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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적 사고’는 실재하는가?

by 미짱0611 2025. 6. 22.

‘영어적 사고’는 실재하는가?– 언어가 사고방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적 고찰

 “영어로 생각해야 영어가 는다.”, “한국어로 생각하면 영어가 어색해진다.”, “영어식 사고를 익혀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다.” 영어 공부를 하다 보면 자주 듣게 되는 조언입니다. 하지만 막상 ‘영어식 사고’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많지 않습니다. 정말 언어는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는 단지 ‘다른 언어를 사용할 뿐’인 걸까요?

 오늘은 언어와 사고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언어학과 인지심리학, 그리고 신경과학에서 제시된 이론과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영어적 사고’라는 개념의 실체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영어적 사고’는 실재하는가?
‘영어적 사고’는 실재하는가?

 

언어상대성가설 –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가?’

 ‘영어적 사고’라는 개념을 논의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이론은 바로 언어상대성가설(Language Relativity Hypothesis)입니다. 이는 미국의 언어학자 벤저민 리 워프(Benjamin Lee Whorf)가 주장한 이론으로, 다음과 같은 기본 전제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사고방식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달라진다.”

이 이론은 우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지각하고 사고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언어는 색깔을 3가지로 구분하지만, 또 다른 언어는 12가지로 구분합니다. 이때 더 많은 색 표현을 가진 언어 사용자들이 실제로 색 구별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실험 결과들이 나오면서, 워프의 가설은 부분적인 지지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가설은 이후 수십 년 동안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초기에는 과학적 근거 부족으로 ‘과장된 주장’이라며 비판과 반론이 이어졌고, 이후 인지과학과 신경언어학의 발전을 통해 보다 정밀한 연구들이 등장했습니다.

최근의 학계 흐름은 이렇습니다:

강한 언어결정론(strong version) → 거의 부정됨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지는 않음)

약한 언어상대론(weak version) → 부분적으로 지지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수용됨)

결국, 우리는 ‘영어를 쓴다고 영어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어라는 언어 체계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특정한 인지 경향이 강화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영어가 사고에 미치는 구체적 영향 – 구조, 주의, 시간 개념

그렇다면 영어라는 언어의 어떤 특징이, 실제로 사고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여러 실험과 사례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밝혀졌습니다.

1. 문장의 구조가 인지 경로를 바꾼다
한국어는 주어 생략이 자유롭고, 목적어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영어는 항상 주어-동사 중심 구조를 따릅니다. 이로 인해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행위자(agent)를 중심으로 사건을 파악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를 들어 실험에서, 한 사람이 컵을 깨뜨리는 장면을 보여준 후, 영어 사용자는 “He broke the cup.”, 스페인어나 일본어 사용자는 “The cup broke.” 또는 “그 사람이 실수로 깼다.”라는 식으로 의도나 결과 중심으로 기술하는 차이를 보였습니다.

이런 차이는 책임 인식, 원인 판단, 사고 구조 형성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2. 언어는 주의를 이끄는 방식에 개입한다
언어마다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정보에 더 주목하게 되는지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영어는 방향, 위치, 전치사를 자주 사용하기 때문에 공간 정보에 민감해집니다. 반면 한국어나 중국어처럼 맥락적 요소가 중요한 언어 사용자들은 관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언어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할 때 어떤 요소에 주의를 둘지 선택하는 필터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3. 시간 개념의 차이 – 언어에 따른 시간의 공간화
언어가 시간 개념을 어떻게 다루느냐도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입니다. 영어는 과거-현재-미래의 시제를 명확히 구분하며, 공간적으로도 좌→우, 앞→뒤의 직선적 개념을 따릅니다.

예를들면 “Looking forward to it.”, “Put it behind you.”고 같습니다.

반면, 만다린(중국어) 사용자들은 시간의 상하 방향(예: 과거 = 위, 미래 = 아래) 개념을 더 자주 사용하며, 이는 뇌의 시간 인지 패턴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사고 자체를 ‘선형적 시간의 흐름’으로 구조화할 가능성이 크며, 이것은 계획 수립, 목표 설정, 원인-결과 사고 등에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영어식 사고’는 실재하는가 – 교육적 함의와 한계

이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영어식 사고’는 실제로 존재할까요?
정확히 말하면, 영어식 사고란 영어라는 언어 구조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형성된 인지 습관 또는 패턴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영어 사용자들은 문장의 구조, 사고 순서, 주목하는 요소, 시제 인식 등에서 특정한 인지 편향을 갖게 되며, 이것이 일정 부분 사고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어를 잘하려면 영어식 사고를 해야 한다”는 말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학습 전략의 방향성을 잡는 데 있어 실제로 의미 있는 조언이 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교육적 접근이 가능합니다:

1. 문장 구조 중심의 사고 훈련
한국어로 생각한 후 번역하려 하기보다, 처음부터 “누가(주어) 무엇을(동사) 어떻게(보어/부사)”의 구조로 문장을 영어식으로 구성하는 훈련이 유창성에 도움이 됩니다.

2. 상황에 따른 표현의 우선순위 훈련
예: 영어에서는 상대방의 감정보다 행동 제안이나 정보 요청이 먼저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 “Can you give me a hand?” (vs. “혹시 바쁘지 않으세요?”)

3. 시제와 원인-결과 사고의 훈련
계획, 경험, 가정 등을 말할 때 시제 구분과 논리적 연결어를 영어적 흐름으로 연습하는 것이 사고 전환에 도움이 됩니다.
→ “I would have done it if I had known earlier.”
→ “Since it rained, we decided to cancel the trip.”

이러한 ‘영어식 사고’의 훈련은 단순히 문장 외우기가 아니라, 언어의 구조 속에 숨어 있는 인지 흐름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언어는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다

 “우리는 언어가 허락하는 만큼만 생각할 수 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 말은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이제 과학적으로도 점점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어 사용자로서 맥락과 정서를 중시하는 사고 습관을 갖고 있지만, 영어를 배우며 서서히 다른 구조, 다른 표현, 다른 사고 흐름에 익숙해져 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젠가 새로운 사고 습관으로 자리 잡기도 합니다.

‘영어식 사고’는 단순히 외국어 표현의 방식이 아니라, 그 언어가 바라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사고해보는 훈련입니다.
따라서 영어를 잘하고 싶다면, 단어와 문법을 넘어서 그 언어의 시선으로 생각해보려는 시도, 바로 그곳에서 진짜 변화가 시작됩니다.
지금 내가 쓰는 언어가, 나의 생각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그 질문이야말로 언어 학습자에게 가장 철학적인 출발점일지도 모릅니다.